( 책 ) 리스본행 야간열차( Nachtzug nach Lisbon)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김영사 발간, 2022, 608쪽
오래전 동명의 영화를 감명깊게 보고 OST까지 즐겨 들었던 터라, 원작 소설의 존재를 알면서도
굳이 읽어야 할까 싶었는데 "리스본행 야간 열차 "가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에 이끌려
뒤늦게 읽는다. 역시 영화는 영화일 뿐, 소설의 풍부한 내용과 깊이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영화가 소설의 스토리 전개를 기본으로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영화적 재미를 위해
마지막 부분에 사랑 이야기를 극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등 변화는 주고 있다보니 내용의 깊이에 있어서는
소설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영화의 한계일테니 고전이나 유명한 소설로 만든 영화는 원작을 읽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의 저자인 파스칼 메르시어는 철학 교수인 페터 비에리(Peter Bieri)의 필명이다.
철학 서적을 집필할 때는 본명을 사용하고, 소설을 쓸 때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쓴다고 한다.
이 필명은 프랑스의 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어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라고 하니, 작가의 철학적 배경이 소설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영화에서 다루지 못했던 철학적 내용들, 특히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의 내용이
끊임없이 언급되며 전개된다. 이 부분이 상당히 심오하여, 단순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깊이 사유하며 읽어야 하는 몰입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와 그가
리스본까지 추적하는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 프라두의 인생은 어쩌면 한 사람의 두 가지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궁극적으로 "리스본행 야간 열차"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떠나는 용기,
선택하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주체적인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재정의할 기회를 제공하는 내용이라는 생각을 한다.
소설을 읽으며 언급되었던 페소아의 "불안의 책"도 구매하여 조금씩 읽고 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소설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하니 내가 굳이 수고할 필요가 없이 출판사에서 요약한 것을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소설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나태내는 귀절 하나..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 멜로디를 주는 경험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출판사 요약 소설의 줄거리..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 ‘걸어 다니는 사전’ 그레고리우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학교로 향한 그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할 눈앞의 학생들과 달리 나의 인생엔 무엇이 남았는가?
먹먹한 물음 끝에 충동적으로 수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포르투갈어로 적힌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에서 자기 심정을 완벽히 반영한 문장을 발견한다.
“우리가 우리 안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 채,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다.
리스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일생을 추적한다.
살라자르의 독재정권이 이어지던 시절, 존경받는 의사였으나 악명 높은 비밀경찰의 목숨을 살려준
사건을 계기로 모든 신망을 잃고 죽기 전까지 남몰래 저항운동에 참여한 아마데우.
타인의 삶을 좇아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그레고리우스의 여정 위로, 아마데우가 생전에
기록한 빛나는 사유가 포개진다. 불확실한 열정으로 올라탄 열차가 데려다준 낯선 도시.
흘러가는 자기 삶을 붙잡으려는 사람과 세상의 불합리에 맞서 싸운 망자의 시대를 뛰어넘는
만남이 펼쳐진다.
사족 : 이 블로그 글을 마치고 영화를 다시 찾아 보니 ( Youtube 영화에서 )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도 좋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보다 어쩌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