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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Photos)

( 사진 ) Myanmar 의 추억들

by ts_cho 2021. 4. 24.

최근에 있었던 미안마 군부 구테타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기고 있으나 군부의 강경 진압은 멈출 줄 

모르고 날로 악화되고 있고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지만 군부는 전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고 날로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는 안타까운 뉴스 뿐이다.

 

미안마 뉴스를 접할 때마다 단편적으로 기억을 스쳐가는 미안마의 추억들이 지금의 상황과 오버랩 된다.

미안마에서 찍었던 사진 몇장과 -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보니 변변한 사진도 없지만 -그냥 생각나는

미안마의 추억 두서없이 몇개 적어본다.

 

말레이시아에 현지그룹과 합작투자로 제조업 공장을 만들고 직접 경영을 하던 시절 미안마에 거래처가 생겨 조금씩

비지니스를 하다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잔뜩 호기심을 갖고 갔던게 아마 1993년경인 것 같다. 

당시까지도 아웅산 수지 여사가 감금되 있던 시절이니 서방의 제재가 있어 경제가 한참 어렵던 시절인데 꽤나 낡은

공항에 내리니 -지금은 일본 자본이 무상으로 지어준 번듯한 공항이 있지만- 비행기에서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데

그 버스가 일본 어디 백화점에서 쓰던 버스인지 일본말이 여기 저기 적혀 있고 또 저쪽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는 

한국에서 쓰던 시내버스 그대로 한국말이 적혀 있어 참 신기하게 본 기억이 있다.

거래처 공장이래야 조그만 영세 공장 볼 것도 없이 초라했고 한국인인 공장 사장집을 가는데 위치가 그래도 미안마 양곤

시내에서 고급 동네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집 바로 길 건너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감금된 집이 있어 도로를 양쪽에서 

군인들이 통제하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살벌하던 경험에 비추어 너무도 한산하고 평화스런 모습에 깜짝 

놀랐던 기억도 있다. 계속되는 군부의 지배에도 국민들이 큰 저항없이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신기해서 물어보니

국교가 불교이다보니 국민들이 상당히 온순하고 또 일과가 끝나면 양곤시내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사원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평화로운 국민들이라 그렇다고 한다.  결국은 어쩔 수 없는 군부독재에 자포자기한 국민들이 종교에 의존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내세의 행복을 빌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990년대 초반 말레이시아는 매년 10% 이상의 고공 경제성장을 달성하던 시절이라 공장 근로자 구하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제3국인들을 -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미안마- 고용해서 일부를 채웠는데 경험상 미안마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 비해 온순하고 성실했던 기억도 있다.

그 이후 몇번 더 비지니스도 비지니스지만 그냥 머리도 식힐 겸 동남아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면서 미안마 몇번 더

간 기억이 있는데 지금 기억나는 것이 대사관에 가서 입국비자를 받을 때 수수료가 꽤나 비싸서 나라가 가난하다보니

이런 것으로도 장사를 하는구나 하고 불평한 기억도 있고. 또 암시장에 가면 공식환율과 거의 10배 차이가 나서

암시장에 가서 아주 낡아서 냄새도 고약한 현지통화를 바꾸어  음식점에 가서 그냥 한 보따리 세지도 않고 주었던

기억도 있고.

 

2006년 경영하던 말레이시아 회사를 정리하고 귀국해서 쉬고 있을 때 한국의 모업체와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국제 유가가 100불이 넘어서다보니 대체연료 개발이 한참 관심을 받고 있던 시절인데 즉 바이오디젤을 만들기

위해 동남아에 대규모 플란테이션 투자를 위해 그래도 동남아 경험이 있다고 다시 말레이시아에 현지회사를 만들어 

나가게 되는데- 바이오디젤 비지니스 이야기하면 제법  긴 얘기가 되는데 MB와 관련된 스토리, 2008년

금융위기에 날라간 메릴린치가 투자했던 이야기 등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것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하고 - 여의도 넓이 정도의 경작지를 찾기 위해 인도네시아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미안마에 이미 상당 규모의 

플란테이션이 있다고 하여 찾아 가게 된다. 그 때 미안마 군부는 이라크 전쟁시 미국이 보여준 엄청난 군사력에 놀라고

또 중동에서 제대로 원유를 수입하지 못할까봐 겁을 먹어 대체 연료 개발에 엄청 관심을 보이고 있던 시절이라

당시 미안마 최고의 재벌그룹에서 여의도 넓이 정도의 플란테이션을 개발에 착수한지라 현장에 가서 보니 끝도 없이

넓은 지역에 이미 상당 부분 경작이 진행되고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산을 깎아서 경지를 만드는 작업이 열심히

진행되고 있었다.  현지회사와 이런 저런 향후 비지니스에 관해서 미팅도 하고 골프도 치고 그런 기억이 있다.

그 때 또 한번 이글을 했던 즐거운 기억도 있고.ㅎㅎ 그 이후 국제유가가 계속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투자자들의

자금 투입이 지연되다보니 진척도 없던 차에 국내 굴지의 비지니스 그룹에서 원래 내가 하던 비지니스와  관련된

사업을 베트남에 투자하기로 결정하면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베트남으로 진출하면서 바이오 연료 사업은

손을 떼게 된다.

 

그 이후 고공으로 진행되는 국제 유가도 셰일가스의 개발과 더불어 하락하면서 바이오 연료의 사업성이 문제가 

되기 시작해서 별로 희망적인 뉴스를 듣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 쓰나미가 미안마 해안을 강타하면서

그 끝도 보이지 않게 개발된 바이오디젤 플란테이션을 싹 쓸어 갔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셰일가스로 국제 유가가 계속 떨어지면서 바이오 연료의 개발 프로젝트는 지구상에서  다 사라지고

또 쓰나미에 쓸려 갔다는 그 엄청난  투자규모의 경작지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때는 지난 일들이 하나의 꿈과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냥 두서없이 머리를 스치는 이런 저런 기억 몇 가지 써봤는데 한 때는 동남아 최고의 곡창지역으로 

잘 살던 나라였고 1960년대 메르데카배나 킹스컵과 같은 아시아 국제 축구대회에서 거의 항상 한국과 결승 경쟁을

하던 그런 국가가 군부의 장기 집권 그에 따른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이제는 동남아시아에서 후진국으로 전락된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는 심정이다.  

 

2007년 미안마 방문시에 느낀 단상을 고교동창 싸이트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옮긴다.

 

지난 주에 미안마에 다녀왔다. 2년전에 한번 가보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때는 어디 낡은 시골역의 대합실같이 우중충하던 공항이 이제는 깨끗하고 모던한 새건물로
바뀌어 일단은 산뜻하다. 지난 몇달전의 대규모 시위 탓인지 외국인은 거의 없고 출국하는 미안마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일이 plantation과 관련된 일인지라 며칠동안 여기 저기 몇시간씩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런대로 일부는 포장이 되어 있었지만 여기저기 정비가 제대로 되자 않아 엉망인 길들을
사람들이 장비로 제대로 없이 쭈구리고 앉아 자갈을 다듬고 보수랍시고 하고 있었다.
하루에 임금이 USD 1.-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면서 어린 아이들,여자들 피부는 까맣게 그을었고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일하고 있으며 지나가는 우리를 그냥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그 눈길들이 슬프다.
 
한 때는 동남아 최고의 곡창지대를 자랑하던 그 넓은 평야에는 여기저기 마른 갈대같은 것으로
엮은 움막같은 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군데 군데 회색빛 물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양곤 시내에는 서방세계의 경제 제재가 지속된 관계로 다 낡은 차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아니 사람들이
매달려서 다니고 있었고 공장들은 문을 닫고 사람들은 그냥 일거리를 찾아 돌아 다니고 있었다.
국민의 85%가 불교 신자라던데 그 불교 때문인지 아니면 군사정부의 강압 정치에 따른 체념때문인지
그 얼굴들마다 다른 동남아시아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순박하고 또 무표정하기만하다.
시내에 그나마 몇있는 나이트클럽에는 외국인들이 없으니 한산하기가 짝이 없고 생계를 위해
내몰린 젊은 여자들이 단지 몇달러의 팁을 바래 우리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들이 그런대로 매력적으로 그래서

더 슬퍼보인다.
거리에는 아직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무가 울창하여 시원하고 평화스런 느낌은 주고 시장에는
시간이 마냥 더디게 흘러가고 있는듯 그냥 옛날 고물들을 널어 놓고 파는 사람들, 한때는 동남아의 맹주를
자처했었고 우리보다 잘 살았었다는데 이제는 일인당 국민소득 200불도 못되는 나라. 그래도 그 속에서
사람들의 삶은 질기게 계속되고 있고.
 
게리플래이어가 디자인했다는 멋진 골프장에서 한 라운드하고 호텔로 돌아와 시원한 맥주 한잔 목을 축이며
이런 저런 생각들.
전세계 인구의 1/6이상이 절대빈곤선(하루에 USD1.-이하)이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데.
젊은 시절에는 신이 있니 없니 하면서 내 이성을 뽐냈었고 또 언어의 유희도 즐겼었지만
지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정말 신은 있어야할 것 같고 또 내세는 꼭 존재해야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삶이 한번으로 끝난다면 이 세상은 너무 unfair한 것 아니가.
내세가 있다면 나는 내세에 어디에 있을까 ....천당(?). 글쎄........
 
창밖에 멀리  높이가 100미터에 육박하는 황금으로 덮인 쉐다곤 파고다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