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을 쓰다 1- 흠영 선집,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돌배게 발간, 2016, 331쪽
약 200년전 서울에 살았던 사대부 지식인 유만주(1755-1788) 가 만 스무살에 시작하여 서른 네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쓴 일기를 모은 책으로 구성은 1,2권으로 되어 있고 1권은 유만주 개인의 면모와
관련된 내용이고 2권은 18세기 조선의 아름답고도 비참한 면면을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어떤 연유로 이 책을 찜해 놓았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아마 어떤 기사에 이 책이 언급된 것을 보다가
이조시대의 사대부가 쓴 일기는 어떨까 궁금하여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13년의 시간 동안 꼼꼼하게 쓴 이 일기를 그는 흠영(欽英) 이라고 불렀는데 이 뜻은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일기를 보면 유만주는 사마천과 같은 위대한 역사가가 되기를 소망하며
그러기 위해서 정사,야사 및 소설까지 구할 수 있는대로 구해서 읽고 살았던 독서 마니아라고 할 수 있었던
사대부인데 어찌어찌해서 과거에는 실패하고 그냥 책만 보고 사색하고 짧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당시 그래도 양반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직업이 없어도 책만 보고 먹고 살 수 있었던 좋은 팔자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항상 빈곤에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기록되고 있다.
1권은 유만주의 개인적인 소회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래도 당시 조선 22대 왕이었던 정조 시대의 사회 모습들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고- 2권에는 그런 부분들을 발췌해 놓았다고 하니 읽고 나서 또 쓰기로 하고- 아무튼
부실한 과거제도와 과거 시험장 장면들도 있고 또 당시 선비들의 삶을 엿볼 수도 있다.
비록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그리고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는 일개 필부의 삶이었지만
한 개인으로서 13년간 꼬박꼬박 일기을 기록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그의 성실한 삶이 의미가 있는 삶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들을 솔직히 기록하고 있어 읽어 가면서 같이 공감하는 부분도 많고
책 말미에 사랑하는 어린 자식이 병으로 죽었을 때의 일기을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의 글솜씨가 수준급이고 심미주의적 취향과 어느 정도 몽상가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기록이면서 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문화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된다고 한다.
일기라는 것이 생각해보면 매일의 삶을 기억하여 기록함으로서 기록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을 반성해가면서 보다
나은 자아의 완성에도 그 의미가 있는 것일텐데 그런 점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한 사대부의 삶에
지금의 나를 비추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한동안 일기를 썼던 기억도 있지만 까마득한
옛일인데 그래도 뭔가 삶을 기록하고 싶어서 지금 이 블로그를 끄적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
일기 중의 몇 개를 여기 옮기면
1782년 2월 20일
아침에 비가 약간 뿌리는데 성균관에 들어갔다.
시험을 치르는 성균관도 하나의 극장이다. 뭐 이런 법제가 있는가? 그런데도 눈과 귀에 익숙해지니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제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길을 메운 수두룩한 사람들은 모두 뭐라도 일을 해서 먹고 살고자 한다.
무위도식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나와 같은 부류는 이른바 양반이다. 이른바 양반이란 그 스스로는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들 하지만 그 일이란 몇 편의 부(賦)와 표문 (表文) 을 제한된 시험 시간에
맞춰 써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천지가 사람을 낳은 본뜻이 과연 여기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1785년 11월 21일 날씨가 싸늘했다
우연히 벽에 걸린 지도를 보고 나도 모르게 세 번 빙그레 웃었다. 천하는 크다.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좁고 자질구레하고 하찮으며 구차한 하나의 모퉁이에서 금세 생겼다 소멸하는 존재임에야
누가 알아주겠는가
1785년 5월 4일 흐리고 비가 왔다. 개었다가 가끔 흐렸다.
아침에 층층 정원의 작약꽃을 보았다. 새하얀 꽃은 시들고 짙붉은 꽃이 한창이다. "설령"의 "구강일지"를 보니
"절강성의 동쪽에는 차가 많이 난다. 차의 효능이라면 비린내와 기름기를 제거하고 번뇌를 없애주며 혼미하고
산란한 생각을 물리치게 하고 소화불량을 해소시켜 주는 것을 들 수 있으나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담배는 모여서 피우곤 하는데 차를 모여서 마시는 일은 없으니 이는 또
어째서일까 ?
( 가로 22.5 cm 세로 35.8 cm 로 총 2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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