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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s)

( 책 ) 둥지를 떠난 새, 우물을 떠난 낙타

by ts_cho 2024. 10. 1.

둥지를 떠난 새 우물을 떠난 낙타, 박황희 지음, 도서출판 바람꽃 펴냄, 2024, 366쪽

 

펫북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 자기의 글과 그림,사진들을 올리고 있다.

나도 한 때는 내 그림을 올린 적이 있었지만 그 그림에 좋다고 하거나 댓글들에 대해

일일히 또 댓글을 다는 것도 번거롭고 하여 이제는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내가 관심이 있는 분들 몇 분의 글을 읽는 정도이다.

이 책의 저자 박황희 교수는 고전번역학을 전공한 분인데 가끔씩 펫북에  글을

올리시는데 그 내용은 신변잡기도 있지만 주로 동양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사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인데 개인의 사유와 통찰이 남달라 읽으면서 느끼고

배우는 점이 많아 글을 읽을 때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문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번에 그런 글들을 엮어서 " 둥지을 떠난 새 우물을 따난 낙타" 라는 책이 나왔는데

대부분의 글을 이미 펫북에서 읽었었지만 그냥 한번 읽고 말기에는 아까운 글들이

많아 아쉬웠던 참에 아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양 고전의 지혜가 점차 잊혀져 가는 세상에서 동양 고전의 의미를 새삼 일꺠워 주는

과거 선현들의 주옥같은 명문들이나 금언들을 읽으면서 서양문명에 경도되어 있는

작금의 세상에서 수천년 동안 축적되어온 동양의 지헤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된다.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한글 전용 교육으로 한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생활과 사고의 서구화가 너무 심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교육 정책이란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더  하게 된다. 

그동안 동양 고전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은 너무 고리타분한 느낌이 없지 않아지만

이렇게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쓰여진 주옥같은 글들은 그냥 한번 읽고 버릴 일이 아니니

책상에 놔두고 가끔씩 다시 읽어 보기로 한다.

 

이 책과 함께 발간한 " 을야의 고전 여행" 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속독을 할 책이

아니고 숙독을 할 책이니 천천히 나중에 올리기로 하고..

책 중에 두 꼭지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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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수작 - ‘작(酌)’에 관한 단상]
나의 지인 중에 평소의 말버릇이 아주 독특한 사람이 있다. 뭔가 자기에게 관심을
나타내거나 반가운 인사치레 말이라도 건널 때면 으레 하는 말이 “이게 어디서 허튼수작이야”라고
하여 종종 헛웃음을 짓게 한다.
우리는 때로 ‘허튼수작’이니, ‘개수작’이니 하는 등의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수작’이란 말의 의미는 무슨 뜻일까?
‘수작’의 한자어에는 부수가 모두 술 ‘주(酒)’ 자가 들어가 있다.
술과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수(酬)’는 갚다, 말을 주고받다, 보답하다 등의 의미이고
‘작(酌)’은 따르다, 잔질하다 등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수작(酬酌)’은 서로에게 잔을
주고받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다.
‘짐작’하다 할 때의 ‘짐(斟)’은 술을 따르다, 헤아리다 등의 의미이다.
술잔이나 술병에 있는 술의 양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의미이다.
고대의 술잔이나 술병은 요즘과 같은 유리잔이나 크리스탈이 아니어서
상대의 남은 잔이나 호리병 속의 술의 양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헤아려서 살피는 것이 ‘짐작(斟酌)’인 것이다.
정상을 ‘참작’하다 할 때의 ‘참(參)’ 은 헤아린다는 뜻으로서 상대의 주량이나
취한 상태의 정도, 그리고 술좌석의 분위기나 동석한 사람 등의 상황을 고려하고
살펴서 잔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정상을 참작(參酌)한다.’라는 법률용어가 파생된 것이다.
한편 상대에게 술을 따를 때 오른손 아래로 왼손을 바쳐서 술잔을 올리는 풍습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상대에게 공경을 표현하기 위해 단순히 두 손으로 따르는 것일까?
어떤 이는 술병의 상표를 가리지 않고 두 손으로 따라야 한다거나 왼손으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가려서 따라야 한다는데 이는 모두 낭설에 불과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복의 도포 자루가 넓어 음식에 닿을까 왼손으로
도포 자루를 감싸며 잔을 따랐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대체로 남자들이 술을 마시는 술집에는 때로 손님을 접대하고 술 시중을 드는
여자가 있게 마련인데, 이런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작부(酌婦)’라 하였다.
고문서를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유의 여인을 매우 점잖게 표현한 전문용어가 있다.
이른바 ‘조음지좌(助飮之佐)’라는 것이다. 그 단어의 속뜻은 ‘마시는 일을 돕는 보좌관’이란 소리이다.
신분 사회의 계급적 질서와 차별을 느끼게 하는 언어유희이다.
어쨌거나 술좌석의 분위기를 ‘참작(參酌)’하거나 술병의 양을 ‘짐작(斟酌)’하지 않고
‘작부(酌婦)’가 권하는 ‘수작(酬酌)’에 무작정(無酌定) 마시다 보면 반드시 낭패(狼狽)를 당하기가 십상인 것이다.
·
·
모든 음식은 자신이 먹을 만큼 스스로 자기의 그릇에 담아 먹는데 왜 유독 술만은
꼭 남이 채워주고 권해야 먹게 되는 것일까?
가령 어떤 이가 ‘나는 꽃을 사랑한다.’라고 하면서 꽃에 물 주기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를 진정으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꽃에게 필요한 것은 꽃이 좋다고 느끼는 ‘제 3자적 감정’이 아니라 꽃에게 필요한 것을
직접적으로 채워주는 ‘당사자적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술은 왜 마시는가? 아마 배가 고파서 술을 마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충분한 먹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술을 찾는 까닭은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증명하고픈 사회적 ‘만남’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만남이란 사랑을 위한 전제의 단계이며, 사랑의 첫 단계는 언제나 만남이라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는 관계의 유지만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반드시 채움이 필요한 것이다.
꽃에게 ‘물’이 필요하듯 사람에게도 ‘정(情)’이라는 물질이 필요한 법이다.
술은 상대에게 감정의 메신저가 되어 정을 채우는 매개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상대에게 술을 따르는 행위는 꽃에게 물을 주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
사랑을 채우고, 정을 채우는 자기애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혼·술’은 만남을 배제한다는 데서 고립과 자학의 냄새가 물씬 흐른다.
어쨌거나 이러한 채움과 비움의 반복된 행위를 통해 서로의 관계가 긴밀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이 이른바 ‘수작’이란 것이다.
·
·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위학일익(爲學日益)이요,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 학문을 하는
것은 날마다 채우는 것이요,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비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날마다 채우고 비우는 일을 반복해야 아름답다.
우리의 육체 또한 섭생과 배설을 반복해야만 건강이 유지되는 법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명예와 부를 쌓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욕망을 비워내는 일은 그보다 더욱 힘들다.
성공에서 물러나 ‘공수신퇴(功遂身退)’ 하는 일이야말로 채우고 쌓아 올리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진실 하나는 ‘채운 사람만이 반드시 비울 자격이 있다’라는 오묘한 이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작’과 ‘짐작’
‘채움’과 ‘비움’
잔을 채우기 위한 ‘수작’과
잔을 비워내기 위한 ‘짐작’

 

올여름 건배사는

서로의 관계를 위하여 “수작하세”
서로의 마음을 위하여 “짐작하세”
좋지 아니한가?
·
·
어쩌면 ‘혼·술’에 지친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霞田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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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천·노·사 - 貧·賤·老·死]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가난하면서 의지를 잃은 것이다.
‘비천’은 미워할 일이 아니다. 미워해야 할 것은 비천하면서 무능한 것이다.
‘늙음’은 탄식할 일이 아니다. 탄식해야 할 것은 늙도록 삶을 허비하는 것이다.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슬퍼해야 할 것은 죽어서 아무런 일컬음이 없는 것이다.
貧不足羞, 可羞是貧而無志.
賤不足惡, 可惡是賤而無能.
老不足歎, 可歎是老而無成.
死不足悲, 可悲是死而無稱.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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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부끄러워하고 미워할 것은 ‘빈천’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무능함’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빌게이츠가 말하였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실수가 아니지만, 죽을 때까지 가난한 건 당신의 실수이다.”
가난은 구제의 대상이지,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지,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을 미화하면서까지 굳이 부자를 혐오할 이유는 없다.
‘부’는 능력의 상징이요, 신용의 상징이요, 권력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부’가 정직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간혹 청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는
결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는 자신이 소유했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썼느냐’와 ‘어떻게 썼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살면서 자기가 쓴 만큼만 자신의 것이 될 뿐이다. 통장에 수백억을 넣어두고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는 돈을 잠시 보관하며 자신의 눈만 즐겁게 했을 뿐이지 그것이
결코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은행에 수천억 넣어두고(?) 한 푼도 못 쓰고 있는
나 같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탄식하고 슬퍼할 일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한 번뿐인 인생 성취하는 것 없이
늙도록 삶을 허비하여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인생으로 막을 내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세간에 일컬어지는 바가 없어서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잊혀가는 인생’이 되는 것을
슬퍼해야 한다. ‘장수’가 반드시 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이 훨씬 더 소중한 가치이다.
“대장부가 뜻을 품었다면, 마땅히 곤궁해졌을 때에 더욱 굳세어지고, 늙어서는
더욱 건장해져야 한다.” 후한의 명장 마원(馬援)이 한 말이다.
[大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노익장(老益壯)’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늙어서 주눅 든 모습처럼 보기 민망한 것이 없다.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갑자(甲子)’에 접어들었다. 비로소 인생의 본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박력 있고, 씩씩하게 늙으며 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알뜰하게 열심히 쓰고 죽음을 적극적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자.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는, 오직 내가 결정한다. 당연히 내게 손을 내밀어준
나의 이웃들이다. 그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롭게 소멸하자. 본 게임을 못 뛰어 보고
죽은 이에게 미안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그것만은 인생의 빚이다.
霞田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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