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rite and draw to empty my mind and to fill my heart ..
생각들
(퍼온 글) 세월호를 생각하며
by ts_cho2017. 4. 14.
세월호 인양에 즈음하여 한겨레신문에 실린 김훈작가의 글을 여기 옮긴다.
내 개인 블로그에는 나만의 글과 그림을 기록하는 조그만 공간이지만 이 글을 기억하고 싶어서 소위 "퍼온다".
개인적으로 김훈작가의 문장을 좋아하는데 절제된 감정과 사실 묘사가 뛰어나서 이번 세월호 사건에 대해 쓴 그의 글은 기록으로서도
글 자체로도 명문으로 의미가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슴속에 슬픔이 출렁거린다.
세월호 3주기 추모 김훈 특별 기고
밑창 드러낸 배는 녹슨 철 빔이 너덜거렸다
한시대의 허상이 무너져버린 거대한 폐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이 슬픔에 불을 지른다
1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신항에 도착한 세월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철재부두 펜스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다.
2017년 3월31일 새벽에 전직 여성 대통령은 화장을 지우고 올림머리를 풀었다.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은 힘들어 보였다.
전직 대통령이 수인번호 503을 달고 구치소로 들어갈 때, 구치소 정문에는 ‘희망의 시작, 서울구치소입니다’라는 대형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날 삼성동 빈집 마당에 목련이 피었고 세월호는 목포항으로 실려 와서 부두에 옆구리를 들이댔다. 세월호는
죽은 괴수처럼 옆으로 쓰러져서 배 밑창을 드러냈다. 녹슨 철 빔이 너덜거렸다.
그 고철은 한 시대의 허상이 무너져버린 거대한 폐허처럼 보였다. 갈매기들이 휘어진 난간에 내려앉아 죽지에 부리를 닦았다. 남쪽 바다 맹골수도에 또 봄이 와서 배 빠진 자리에 물비늘 반짝이고 먼 섬이 아지랑이 속에서 흔들린다. 작은 섬에 매화가 피고 동백꽃이 떨어지는데, 자식 잃은 엄마들은 산 위에서 울고 물가에서 운다.
그 봄의 며칠을 나는 목포항, 팽목항, 동거차도, 서거차도에 머물면서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바다가 사나워서 여객선이 들어오지 않는 날 팽목항은 썰렁했다. 바다에 날이 저물고 방파제 끝 무인등대 쪽에서 사람들이
말없이 서성거렸다. 다가가서 물어보니, 서울 사는 70대 고교동창생들이 진도에 봄나들이 왔다가 마음이 힘들어서 팽목항에
들렀고, 청주의 작은 교회 신도들이 이 스산한 항구를 일삼아 찾아왔다.
항구에 인기척은 초저녁에 끊어졌고 밤이 깊어져서 물도 하늘도 보이지 않을 때 상심한 사람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무인등대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렸고, 일렬종대로 늘어선 깃발들이 캄캄한 바다를 향해 펄럭였다.
깃발들은 밤새도록 펄럭이고 또 펄럭였다.
숨진 단원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갈 때 받은 용돈은 5만~10만원 정도였다. 나와 말을 나누었던 여러 학부모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학부모들은 대체로 시화공단을 중심으로 일하는 근로소득자들이거나 소규모 자영업자들인데, 살림 형편이 “다들 고만고만하다”고 말했다. 수학여행 용돈 5만~10만원은 그 ‘고만고만’한 살림 규모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액수일
것이다. 이 액수에는 생활의 고난과 소망의 무게가 실려 있다. 고난과 소망이 교차하면서, 생활은 영원하다. 이 5만~10만원은 삶을 통과해 나온 숫자로 거품이나 과장 없는 생활의 지표다. 나는 정부가 발표하는 물가동향이나 거시경제지표보다도
이 5만~10만원의 지표를 더욱 신뢰한다.
막내로 태어난 한 학생은 15만원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10만원을 주었고 취직한 형이 3만원, 누나가 2만원을 주었다. 갓 취업해 받은 월급으로 수학여행 가는 막내에게 용돈 2만~3만원을 주는 큰 자식들의 성취감과 자부심, 그 돈을 받는 막내의 기쁨(용돈은 아버지한테서 받을 때보다 형한테 받을 때 더 신난다. 이때 형과 동생은 혈맹이 된다), 그 돈을 주고받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뿌듯한 - 이 작은 행복을 위해 부모는 평생의 노동을 바쳐서 자식을 기르고 가르쳤던 것인데, 이 소중한 행복은
지금 바다 밑에 잠겨서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이 부모들의 슬픔에 불을 지른다.
막내로 태어난 한 학생은 15만원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10만원을 주었고 취직한 형이 3만원 누나가 2만원을 주었다
소설가 김훈이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죽은 아이의 목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 빛의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딸아이의 검은 머리채, 처음으로 립스틱 바르고 깔깔 웃던 입술, 아들이 동네에서 축구 하고 돌아온 저녁의 땀 냄새, 학교 가는 아이를 먹이려고 아침 밥상을 준비할 때 찌개가 끓으면서 달달거리는 소리…. 이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인가. 이 사소한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비로소 안다.
팽목항에서 동거차도로 가려면 사선(私船)으로는 50분 걸리지만 여객선으로는 2시간 30분 걸린다. 여객선은 섬마다 들러서
사람을 태우고 짐을 내린다. 동거차도에서 뱃길로 목포를 가려면 ‘섬사랑10호'를 타야 한다. 이 배는 서남해안의 32개 섬을
모두 들른다. 섬들은 나란히 줄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섬사랑10호'는 섬들을 굽이굽이 돌면서 항로를
이어간다. 선원이 항해 중에 미리 섬에 전화해서 승객과 화물이 없으면 그 섬에는 들르지 않는다. ‘섬사랑10호'는 그 이름처럼 섬과 섬을 잇는 생명줄이다. 동거차도에서 목포까지 바다가 순하면 9시간 걸리고 바다가 사나우면 도착시간을 기약할 수 없다. 동거차도 할머니들은 두 끼 먹을 도시락을 준비해서 이 배를 타고 친정에 가고 육지 나들이를 한다.
동거차도의 인구는 40여 가구에 주민 110여명이다. 숙박업소나 식당, 허가 난 민박은 없다. 외지에서 온 사람은 모두 주민들의 살림집에서 기식해야 한다. 세월호 인양작업이 시작되자 동거차도에는 주민보다 많은 보도종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섬 주민들은 방 한 개 1박에 4만원, 밥 한 끼에 7천원으로 값을 합의해서 바가지요금을 막았다. 방이 모자라다 보니 1인 1실은 어림도 없었는데, 4만원짜리 방에서 4~5명이 끼어 자도 추가요금을 받지 않았다. 보도진은 한방에 대여섯 명씩 포개서 잤고, 소속이 다른 기자들끼리도 한방에서 잤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활공간 전체를 손님들에게 내주었고 기자와 피디(PD)들은
방뿐 아니라 거실에서도 제집처럼 뒹굴면서 쉬었다.
동거차도 주민들이 나에게 먹여준 밥은 최불암이 티브이(TV)에서 보여주는 ‘한국인의 밥상' 그대로였다. 그 음식은 공업적 생산과정이나 상업적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연과 직접 교감함으로써 빚어지는 맛과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맛은 영혼의 심층부에 각인된다.
동거차도와 서거차도의 미역은 전국 미역 랭킹에서 최상위권에 속한다. 이 미역은 맹골수도의 거센 물살에 부대끼며 자라나서 잎이 넓지 않고 질감이 야무지다. 동거차도 미역은 바다의 어려움을 내면화해서 고난을 부드러움으로 바꾸어놓는다. 이 미역은 끓일수록 뽀얀 국물이 우러나고 건더기는 쫄깃쫄깃한 탄력을 계속 유지한다. 주민들은 이 미역을 ‘쫄쫄이 미역'이라고 부른다. 동거차도 미역국에서는 젊은 어머니의 몸 냄새가 난다. 이 모성의 국물은 부드럽고 포근해서 한 모금 넘기면 꼬인 내장이
펴지고 뭉친 마음이 풀어진다.
동거차도 냉잇국을 넘기면서 세상의 죄업 대신 짊어지고 캄캄한 물밑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은 참혹했다
저 영혼들에 냉잇국 올릴 탈상의 날은 언제인가
첫날은 미역국을 주더니 둘째 날은 냉잇국이 나왔다. 섬의 양지쪽에서 갓 올라온 어린 냉이를 뜯어서 달래를 몇 뿌리 넣고
된장을 풀어서 끓인 국이었다. 냉이는 언 땅속에서 겨울을 견딘다. 냉잇국에서는 겨울을 벗어나는 해토(解土) 무렵의 흙냄새가 났고 그 흙에 스미는 봄볕 냄새가 났다. 한 사발의 국물에 흙과 햇볕의 힘이 녹아 있어서 이 국물을 마시면 창자 속에 봄이 온다. 미역국은 온유하고 냉잇국은 양명(陽明)하다. 한줌의 바다풀과 한줌의 들풀로 끓인 이 국물은 삼투력이 좋아서 사람의
모세혈관에까지 기별이 닿는데, 이 복 받은 국물을 넘기면서 세상의 죄업을 대신 짊어지고 캄캄한 물 밑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은 참혹했다. 세상의 거대한 악(惡) 앞에서 이 가난한 국물 한 그릇은 얼마나 무력할 것인가마는
이미 없는 사람들과는 그조차 나누어 먹을 수가 없으니, 사랑이네 희망이네 하는 것들도 한 사발 국물의 온기에서 시작됨을
알 것이다. 자식을 잃은 한 엄마는 ‘없다'는 말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지를 이제 알았다고 말했다.
2014년 5월19일 대통령은 티브이에 나와서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를 개조해서 새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그때 눈물을 흘렸는데, 양이 많지 않았고, 곧 말랐다. 그 눈물은 신생(新生)을 기약할 만한 뉘우침의 진정성이 없었고,
우는 자신을 정화시켜 주는 슬픔의 에너지가 없었다. 5·19 대루(大淚) 이후에 정부는 울부짖는 사람들 뒤에서 적폐 위에
더 엄청난 신폐를 쌓아갔고 국가는 악을 향해 개조되어갔다. 왕조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한 여러 영신(?臣), 미신(迷臣),
도신(盜臣), 농신(弄臣), 활신(猾臣) 들과 그 밑에 딸린 구종(驅從)과 통인(通引)이며 여기에 빌붙은 궐 밖의 잡인(雜人)들이
국정을 주무르고 농탕질치고 뜯어먹어서 나라는 더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 5·19 대루는 한갓 액즙이었을 뿐 바다 밑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저 원통한 영혼은 아직도 냉잇국 한 그릇 받지 못했고, 이제 배를 겨우 건져 3주기를 맞아도 탈상(脫喪)의 날은 멀다.
목포항에 실려 온 세월호는 ‘배를 째든 잡아먹든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을 세상에 들이대고 있었다. 첫날은 옆구리를 대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는 방향을 돌려서 뱃머리가 부두에 닿아 있다.
인간이 첨단기술과 거대자본을 동원해서 만든 장치나 구조물은 제작과 운영에서 윤리성의 바탕을 상실했을 때 거대한 재앙이 되어서 인간을 향해 달려드는데, 이때 인간은 이 재앙을 회피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 구조물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책에 나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죽어 자빠진 세월호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르쳐주는 죽음과 통곡의
교훈이다. 권세와 이윤이 유일신으로 지배하는 시대를 거치면서 무수한 세월호들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돌아다니는 이
세월호들 위에 사람들이 타고 있다. 물에 빠진 세월호만 세월호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더 크고 더 썩은 세월호였으니,
세월호가 어찌 세월호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세월호만 세월호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더 크고 더 썩은 세월호였으니 세월호가 어찌 세월호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목포신항은 보안통제가 삼엄해서 나는 근접할 수 있는 신분에 미달했다. 나는 멀리서 망원경으로 당겨 보았다. 나는 그처럼
거대한 배가 밑창을 드러내고 쓰러진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을 느끼게 했다. 칠이 벗겨진 자리에
녹이 번졌고, 선미 쪽으로 밀려나온 철 빔들이 뒤엉켜 있었다. 선체 안에는 한줄기 빛도 없었다. 창문들은 캄캄해서 그
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암흑이었다. 물을 빼려고 뚫어놓은 구멍들도 모두 암흑이었다. 세월호는 칸마다 캄캄했고 구멍마다 암흑이었는데, 그 구멍에서 시커먼 펄이 흘러나왔다. 배가 워낙 커서 그 앞을 오가는 중장비들은 딱정벌레처럼 보였다.
안전모를 쓴 근로자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찌했으면 좋겠는가를 웅성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철망 밖에서 상심한 사람들은 쓰러진 배를 바라보며 다들 말이 없었는데, 대선을 한 달 앞둔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찾아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위직 승려들도 다녀갔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노란 리본이 바람에 펄럭였다.
소설가 김훈이 전남 목포신항으로 인양해온 세월호를 바라보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도 어쩌다가 재수 좋아서 안 죽고 남아있는 꼴이 되었고 삶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한 우연의 장난으로 느껴졌다
지난 3년 동안, 유가족들은 슬픔과 분노를 개인의 원한에 가두지 않고 사회적 연대로 확장시킴으로써 분노를 변혁의 동력으로 바꾸어서 시동을 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동력은 2016년 겨울의 전국 촛불집회를 선도하는 추동력 중의 하나로
작동되었다. 서울구치소 정문에 나붙은 ‘희망의 시작'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가 싶기도 하다.
그 3년 동안 분노를 동력화하려는 유가족들의 연대운동은 수많은 박해와 모멸을 뒤집어썼는데, 박해의 가장 핵심적 담론은
‘안보와 경제'였다. 슬픔은 본래 퇴행적 정서이고 분노는 파괴적 충동이며 거기에 오래 집착하는 것은 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소비를 위축시켜서 국가경제를 침체시키고, 사회를 혼란케 하는 행위는 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그 담론의 주요 골자였다.
1950년 후반기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왔고, 피난정부는 부산을 버리고 제주로 달아날 궁리까지 하고 있었다. 그때
반공, 안보, 애국, 총동원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절박한 지향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정치권력은 이 슬로건을 내세워서 국회를 짓밟고 부패로 축재했고 정적을 죽이고 양민을 학살해서 파묻었다. 그렇게 해서 전선이 부산을 조여 올 때도 안보와
반공은 후방사회의 민심을 집결시키는 구심점으로 작동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한줌의 밥을 찾아 부산 거리에서 아귀다툼하며 각자도생했다. 그 후 60여년의 세월 속에서 이 ‘안보와 경제'는 국가의 가장 신성한 가치로 군림하면서 그 휘하에 고급하고
세련된 담론과 법령, 제도, 사법권, 공권력과 감옥을 거느리면서,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윽박질러서 입을 틀어막았고 그래도 입을 닫지 않는 사람들을 내쫓고, 끌고 가서 가두고 때리고 죽이는 국가폭력으로 작동했다. 태극기는 이 국가
이데올로기의 최정상에서 펄럭였고 그 가장 타락한 형태는 40억짜리 말(블라디미르)에 올라탄 정유라의 안전모에 붙어 있다.
사회 공공성의 문제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재수 없는 소수(the unlucky few)로 몰아서 고립시키는 공작은 ‘안보와 경제'가
문제를 회피하는 오래된 방식인데, 세월호 참사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도 어쩌다가 재수
좋아서 안 죽고 남아 있는 꼴이 되었고, 삶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한 우연의 장난으로 느껴졌다.
쓰러진 세월호는 한국 현대사의 괴로운 자화상이다. 그 녹슨 고철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이 괴물은 고통스런 질문과
회한을 한꺼번에 들이대고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조도초등학교 동거차도 분교장은 2010년 10월5일 남학생 5명, 여학생 1명으로 폐교되었다. 분교장은 포구마을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다. 지금 학교 마당에는 묵은 풀이 시들어 있고 신발장에 어린 신발들이 몇 개 엎어져 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리본을 바라보고 있는 김훈 작가. <한국방송> 제공
‘반공소년' 이승복의 시멘트 형상은 국기게양대 옆에 남아 있었다. 시멘트로 찍어낸 형상은 발생기의 태아처럼 두리뭉실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승복은 1968년 무장공비에게 학살당했고, 그 형상이 전국 초등학교에 안보의 아이콘으로
모셔졌다. 폐교된 분교장은 지대가 높아서 이승복의 시선은 울타리 너머로 세월호가 빠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시대의 불행한 구도가 이 작은 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이승복의 시선에 남아 있었다. 가엾은 시선이었다. 지금, 경기도 안산 분향소에는 어린 눈동자 수백 개가 사진틀 밖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영정 속에 눈동자들은 별처럼 박혀 있다. 이 시선들 앞에서
대한민국은 아직도 몸 둘 곳 없고, 숨을 곳도 없다. 이 눈동자들 앞에 동거차도 냉잇국 한 그릇 올릴 수 있는 탈상의 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