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의 가을, 31 x 41 cm, Oil on Arches Paper, 2018
(작년 11월 언제쯤 그렸던 그림)
창밖에 느티나무 잎이 이제 서서히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 보면서
나의 사유는 내면으로 가라앉고 있다.
새삼 계절을 느낀다.....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황동규
오래 벼른 일,
만보(萬步) 걷기도 산책도 명상도 아닌
추억 엮기도 아닌
혼자 그냥 걷기!
오랜만에 냄새나는 집들을 벗어나니
길이 어눌해지고
이른 가을 풀들이 내 머리칼처럼
붉은 흙의 취혼(醉魂)을 반쯤 벗기고 있구나.
흙의 혼만을 골라 밟고 간다.
길이 속삭인다.
계속 가요,
길은 가고 있어요.
보이는 길은 가는 길이 멈춘 자리일 뿐
가는 것 안 보이게 길은 가고 있어요.
혼자임이 환해질 때가 있다.
2
바람 잘 통하는 한적한 곳이
하늘과 가깝다고는 얘기 않겠다.
3
등성이 오르다가
이름 모를 빨간 열매들을 지나친다.
이름을 모르다니?
산수유겠지.
산수유, 저 나무의 황홀한 보석들,
저걸 어떻게 다 꿰지?
꿰서 어디 걸지?
보석 탐하며 걷다 미끄러져
사람의 삶 한 토막이 길 위에 눕는다.
삶의 토막들이 줄지어 누워 있어도
연결되지 않고 서로 부를 때가 있지.
누운 김에 다음 토막을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옷의 흙을 털며 일어난다.
4
늙었다고 생각하면 길이 덜 미끄러워진다, 조심조심.
그러나 늙음은 사람이 향해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방금 빨간 열매를 쪼러 온 허름한 새의 흰 꽁지에는
열매를 쪼는 기쁨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젊은 삶이라는 헛꿈이 사라지면
달리 늙음과 죽음이란 없다.
소리꾼에겐 마지막 소리가
대목(大木)에겐 마지막 집이 잡혀 있을 뿐.
사람은 길을 가거나 길 위에 넘어져
거기가 길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머리 위 나뭇가지들이 레이스 친 둥근 하늘을 만들고
돌고래 구름이 헤엄쳐 가고
마음속이 아기자기해진다.
사람 하나가 어느샌가 뒤로 와 스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바쁜 사람,
메뚜기들이 바지에 달라붙는다.
샘이 잦아들고 있는 밭귀에서 발을 멈춘다.
물이 흐르지 못하고
땅에 잦아드는 것을 보면
주위가 온통 젖다 마는 것을 보면
누군가 가다 말고 주저앉는 모습,
가지 못하면 자지러드는 것이다.
주위를 한참 적시고 마는 것이다.
5
길 위에 멈추지 말라.
사람들의 눈을 적시지 말라.
그냥 길이 아닌
가는 길이 되라.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落膽)도 없는 곳.
스스로 길이 되어 굽이를 돌면
지척에서 싱그런 임제의 할이 들릴 것이다.
임제는 이 길만큼 좁은 호타(?) 물가에서
길이 되라고 할하고
채 못 되었다고 할하고
그만 길이 다 되었다고 할했다.
임제여 임제여,
그대와, 내가 읽는 『임제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둘 다 같다는 손쉬운 답은 말라.
땅이 만드는 풀의 열기
나뭇가지의 싱싱한 냄새
살아 있는 잎들의 서로 무늬 다른 살랑거림.
시인과 그의 시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어느 것이 진품인가?
모르는 사이에 하늘 한편에 가볍게 걸려
빙그레 웃는 낮달.
공들여 빚은 것과 빚은 사람 다 진품이라.
시인은 시가 타는 심지,
허나 촛농이 없다면 그게 무엇이겠는가?
어느 순간 한 삶의 초가 일시에 촛농이 된다면?
할하라,
할하라, 아직 꺼지지 않은 심지를 향해.
6
무너진 사당 앞
나뭇가지에서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와
그 옆 나무 둥치 구멍에 숨어 있는
나무 결 빼어닮은 올빼미를 만난다.
올빼미는 눈을 감고 있지만
곤두세운 촉각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들에게 고개 끄덕이며 사람의 말로 인사한다.
'안녕하신가?'
다람쥐는 움직이던 목젖을 순간 멈추어 인사를 받고
올빼미는 몸을 조금 숙였다 편다.
다람쥐도 올빼미도
팽팽한 삶 속에 탱탱히 가고 있는 자들.
조금 걷다 뒤돌아보니
다람쥐의 목젖도 올빼미의 촉각도 다 그대로 있다.
내 삶이 어느 날 그만 손놓고 막을 내린다해도
탱탱히 제 길 가고 있을 촉각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7
이제 길이
다시 집들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양돈장이 나타나고
버려둔 밭이 나타나고
메마른 검은 사내가 나타나고
서로 인사 않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고 있는 길에 물든 눈으로
도시 상공에 한창 타고 있는 저녁놀을 본다.
잠깐, 그 무엇보다도 더 진하고 간절한,
보면 볼수록 안공(眼孔) 속이 깊어지는.
다리를 건너다 한 사내에게
무심결에 인사를 한다.
얼떨김에 그가 인사를 받는다.
모르면서 서로 주고받는 삶의 빛,
가다 보면 그 누군가 마음 슬그머니 가벼워지는 순간 있으리,
없는 빛도 탕감받는.
길의 암전(暗轉), 한 줄기 빛!
서서히 동굴 벽이 밝아지고
그림 하나가 부활한다.
한 손엔 횃불, 또 한 손엔 붓을 든 사람 하나가
큰 대(大)자로 취해 노래, 노래 부른다.
-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 내가 좋아하는 블로그인 "시 하늘 통신" 에서 갖고 왔습니다. 이런 좋은 시를 알게 되어서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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